지난 8월15일 발매된 대원씨아이의 청소년지 ‘영챔프’ 17호에는 ‘신세기 에반게리온’의 만화판이 재연재되기 시작했다. 그러나 오랜만에 작품을 다시 볼 수 있게 되었다는 반가움보다는 착잡함이 들음은 어찌할 수 없었다. 16호까지만 해도 우리 작품과 일본 작품의 비율이 10:5를 어떻게든 유지하고 있었다. 하지만 ‘신세기 에반게리온’의 재연재로 그 비율이 11:6으로 일본 작품이 우리 작품의 절반을 넘어서기 시작한 것이다.

그런데 이것은 비단 ‘영챔프’만의 문제가 아니다. 학산문화사의 청소년지 ‘부킹’의 경우도 근래 들어 비율 면에 있어서 일본작품이 우리 작품의 수를 추월했다. ‘찬스’와 ‘챔프’ ‘아이큐 점프’ 등 소년지 쪽도 수적으로는 아직은 2:1을 넘어서지 않는다곤 하지만 비중으로는 이미 일본 작품에 상당부분 기대고 있다. 현 추세대로라면 비율의 붕괴는 점차 속도를 더해갈 것으로 보인다. 그나마, 순정지 쪽은 아직까지는 우리 작가들의 비중으로 나름대로 버티고 있다는 것이 위안이랄까.

굳이 이제 와서 한국 만화시장의 일본만화 비중을 두고 왈가왈부할 생각은 없다. 단행본 등 전체 만화시장으로 보자면 이미 눌릴 대로 눌려있는 상황이니까. 그러나 분명 주시해야 할 점은, 만화시장의 한 축으로서 기능하는 잡지 시장마저 이젠 정말 수적으로도 우리 작품의 ‘절반 이상’을 내어주지 않으면 ‘유지되지 못하는’ 현실이 눈앞에 닥쳐왔다는 점이다. ‘살아남기 위해서’라는 이유를 대는 데야 무슨 말을 더 할 수 있을까 싶지만, 아직 우리나라의 만화시장에서 우리 (분명 판매를 목적으로 하는) 작품의 ‘창작’에 잡지가 기여하는 부분이 대부분이라는 점을 생각하자면 이 비율상의 역전이 주는 의미는 상상 이상으로 크다.

결국 잡지를 이루고 있는 것은 작품이고, 작품이 눈길을 끌지 못하니 잡지 또한 조명 받지 못하고, 이것이 지속되다보면 결과적으로 ‘내용과는 상관없이’ 잡지 자체에 무신경해지게 되기 마련이다. 잡지가 자체의 시장을 유지하기는 커녕 부수적인 성격인 ‘단행본의 카탈로그’라는 면조차 유지하지 못하게 돼 손익을 따지다 결국 휴·폐간으로 이어진다. 그리고 그것이 종과는 관계없이 전체로 확산되어 말 그대로 시장 안에서 ‘잡지무용’ 상태로 빠지게 된다(그리고 이미 과거형이다).

문제는 잡지의 침체는 단순히 그것에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기반으로 하는 단행본 시장으로도 고스란히 연결될 수밖에 없다는 점이다. 특히 비교적 염가에 수입하면 그만인 해외(일본) 작품에 비해 창작물에는 해독제 없는 독극물이 되어버린다는 것이다. 비율 붕괴는 그 말로의 상황을 보여주는 한 예일 따름이다. 실상 잡지의 예를 들어 서론을 길게도 잡았지만, 이는 결국 우리 창작물의 ‘실적 부진’을 그대로 반영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한쪽으로 편향된 문제인식, 정작 놓치고 있는 것은 무엇?

대체적으로 이 문제에 대한 인식은 ①잡지 체제(시스템) 기반 자체의 오류 ②출판사의 마케팅 전략 부족 ③작가와 출판사의 ‘판매’ 마인드 부재 ④대여체제에의 안주 등으로 분석된다. 즉, 작품 그 자체에 대한 평가 이전에 보이고 평가받는 일련의 과정에 대한 노력이 없다는 것이고, 이러한 지적들에는 다들 어느 정도 설득력과 타당성이 있다. 실제로 변명의 여지가 없는 부분이기도 하다.

그러나 이유가 과연 그 뿐일까. 일례로 한 유명 스포츠지의 기자는 얼마 전 업계와 관계자들을 모아놓은 공청회석상에서 만화계의 침체와 언론사의 만화 관련 지면이 줄어드는 이유를 ‘대작의 부재’ ‘쓸 거리(기사로 쓸 만한 이야기 거리, 그리고 쓸 만한 작품) 없음’ ‘스스로도 이런 걸 알기 때문에 보도해달라고 자료를 보내오지도 않음’이라고 지적함으로써 문제인식에 대한 (나름의) 보편적 기준선을 긋기도 하였는데, 바로 여기에서 어긋난 부분을 볼 수 있다.

논점과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대부분의 문제제기에서 초점이 오로지 출판사와 작가의 과오(過誤)에 맞춰져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고개를 돌려보자면, ‘보여지지 못했음’은 물론이거니와 ‘보려는 노력’조차도 부족했지 않았던가에 대한 고민은 왜 없을까. 그에 대한 논의와 문제제기가 거의 이루어지지 않은 채 모든 것을 작가와 출판사의 안일함만으로 돌리기엔 입맛이 쓴 부분이 있다.

우리나라에서 만화에 대한 담론이 이루어지고 있는 것을 보자면, 전문적으로 만화를 비평하는 비평가들이나 지식인층에서 만화에 관심을 두는 이들의 저서와 기고, 잡지나 신문지면의 만화면 등이 거의 전부라 할 수 있다. 나머지는 PC통신과 인터넷을 통한 동호회 활동이 채우고 있다. 그 성격상 동호회 활동은 마이아 중심으로 흐르게 마련인지라, 실상 대중(말 그대로 大衆, 대다수의 일반인들)을 향한 만화담론은 전자의 경우에 해당된다고 하겠다.

그런데 이들이 보여주는 담론의 장은 날이 가면 갈수록 줄어들고, 그나마 이어지는 담론들은 상당수가 그 소재를 일본 작품들로 하고 있다. ‘좋은 작품’에 국적 따위를 따져서 무엇하겠냐만, 문제는 그 ‘좋은’의 기준을 우리 작품들에서, 또한 ‘유명’ ‘고전’ ‘명작’ 따위가 아닌, ‘현재’를 이루고 있는 우리의 작품들에서 찾으려는 노력은 그다지 보이지 않아왔다는 것이다. 얼마 전 ‘오늘의 우리만화’ 수상작 발표라는 행사에서도 실상 담론의 대상을 선정해온 시선들의 상당수 또한 그와 다를 바 없었다. 단지 현학적인 문체와 패러다임의 정의에 치중한 분석, 객관적인 시선이라고 여겨지는 ‘면모’들이 곁들여졌을 뿐이다.

작품 그 자체의 힘(과 작가의 능력)도 물론이지만, 작품이 대중의 눈길을 끄는 데 있어 ‘통로’의 역할을 하는 이들의 위치가 얼마나 중요한 지를 생각하면, 과연 우리 작품들에 대한 무관심과 잡지들의 잇따른 휴·폐간의 책임을 작가와 출판사의 과오로만 떠넘길 수 있는지에 대해선 실로 의문이다. 좀 달리 생각해볼 필요가 있지 않을까?

우리 작품들의 상당수가 작품 그 자체와는 별개로 관심 밖에 묻혀있다는 점은 엄연한 ‘사실’이 아니던가. 한편으로는 잡지들의 판매 저조 또한 앞서 언급한 바와 같이 작품들에 대한 무관심에서 시작되는 수렁의 사슬이라는 것도 또 하나의 ‘사실’이 아닌가. 작품 그 자체의 내공만으로 작품의 가치를 모두 드러낼 수 없다는 사실은, 출판사의 ‘마케팅 부재’를 문제시 삼는다면 당연히 함께 인식되어질 문제가 아니던가.

자발적인 홍보도 홍보이지만 그 ‘다음의 영역’에서 뒷받침해주지 못한다면 ‘잘나가는’ 작품이란 게 나오기 어렵다는 것을 우리는 너무도 쉽게 망각한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 물론 현실적으로 그들의 ‘과오’가 차지하는 부분이 크다는 점을 배제할 순 없지만 - 수 십 년에 걸쳐 생성된 오류에서 기인하는 ‘태생적 한계’를 제쳐둔 채 당장의 결과를 들어 ‘애초에 잘못된 방식의 수입일 뿐 이었다’라든지 ‘스스로 잘 나가주지 못하니 안 되는 것 아니냐’라고 말하는 것은, 지나치게 가혹하지 않는가. 심지어 언론 또는 매체 일각에서 당연하듯 튀어나오는 ‘보내주는 홍보·보도자료가 없다’라는 일갈을 접하면 그저 아득해질 따름이다. 실로 ‘등잔 밑이 어둡다’라고 아니할 수 없다.

여기서 한가지 덧붙이고자 한다. 만화유통을 실질적으로 휘어잡고 있던 총판은 합동체제 이후에도 살아 남아있었고, 이후 등장한 만화전문 출판사들이 저지른 가장 큰 패착은 바로 이 총판 유통을 벗어나지 못한 채 그대로 이용하며 판을 벌였다는 점이다. 그러나 그 유통망의 성격과 일본에서 들여온 잡지의 체제(시스템) 모델의 융합은 우리나라 현실에서 곤란한 부분이었음이 사실이다. 하지만 그 선택 자체의 실패를 따져 묻는 것은, 어쩌면 이제 와서는 좀 무의미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 그 당시 만화판에서 다른 방식의 유통에 대한 시도와 고민이 부족했음은 매우 슬픈 일이지만, 업체 입장에선 선택의 여지가 없었던 부분이기도 함을 간과할 수는 없지 않는가. 인간에게 원죄를 언제까지고 캐물으며 ‘애초에 선악과를 따먹지 말았어야 해’라고 할 수는 없는 노릇이듯.

바라건대...

좀 의도적이고 작위적이어도 좋으니, 우리 작가와 작품들을 조명하는 지면이 늘어나기를, 그리고 그만큼 더 떠들어지기를, 나아가 꾸준히 유지되어질 수 있기를 바란다. 대중의 관심을 먹어야 작품이 살고, 작품이 살아야 잡지가 살고, 잡지가 살아야 단행본이 살고, 단행본이 살아야 대중의 관심이 일어난다. 이 지극히 기본적인 순환고리가 이어지는 이상, 어느 한 쪽에 책임을 지운 채 ‘이래서 안 돼 저래서 안 돼’라는 왈가왈부는 서로간의 무책임한 핑계요 ‘직무유기’이자 ‘책임전가’일 뿐이다. 편애라고 한다면 할 말이 없지만, 시선을 받을만한 작품들이 분명히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에서 눈을 돌리는 것은 그들 작가와 작품들에 대한 큰 모독이 아닐까.

흔히들 튼실한 성공에는 꾸준한 투자가 뒷받침되어야 한다는 말을 쉽게 하면서도, 왜 당장의 가시적 성과를 만들어내지 못하는 것에 실망하고 고개를 돌리는 것일까? 할 수 있는 꾸준한 투자, 가장 쉽고 간단하면서도 눈앞에서 시작할 수 있는 일을 놓치고 있는 것은 아닐까? 실상 비판하고 안타까워하고 때로는 화를 내는 부분에 있어 자신들에게도 일말의 책임이 있는 것은 아닐까? 이것을 생각해보고, 반성해볼 필요가 있지 않을까 싶다. 고래로 대물(大物)만 찾다가는 불능(不能)이 되는 법이라는 것을 염두에 두고 따질 것은 따지고 비평, 비판할 것은 하되 가끔씩만 이라도 돌이켜보았으면 한다. ‘없다’가 아니라는 것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