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롤로그

어릴적 보물섬을 보면서 자란세대이고, 드래곤 볼에 푹 빠져봤던 기억이 있는 필자에게는
만화가 주는 문화적 영향력이 지대하다는 것을 잘 알고 있다.
아마 이글을 읽고 있는 여러분들도 나름대로 만화에 대한 저마다의 노스텔지어(향수)를 간직하고 있으리라 생각된다.
만화가하면 신문수 화백, 길창덕 화백 등의 대가들부터 현재 인터넷으로 활동하는 만화가까지
이름을 열거하기 힘들 정도로 그 세대 폭이 광범위하다.

컴퓨터그래픽이 활성화되면서 만화에 디지털영역이 파고든지는 이미 오래되었고,
현재 씨지랜드 작가이자 만화가로 활동하는 대표적인 작가들도 그 스펙트럼 안에 포함되어 있다.
심승현, 석정현, 강재호, 최규석, 변기현, 등등....
일본만화의 유입은 이미 오래된 일이지만, 이로 인해 타격을 입었을 한국만화의 기로에 대해서는 여전히 말들이 많다.
부정적인 측면이든, 발전적인 자극이든, 필자의 사견으로는 한국만화가 아직은 어두운 터널에 정체되어 있다고 생각한다.
그렇기 때문에 항상 하는 얘기지만 젊은 작가들이 나서야 한다.
그들이 누구보다도 일본 만화를 이해하고, 영향을 받았음은 부인할 수 없지만
그렇기 때문에 그들에게는 신선한 자극과 개성이 넘쳐난다.


변기현을 만나다.

이번 시간은 씨지랜드의 작가이자 한국만화의 젊은 피(?)인 변기현작가에 대해 이야기해 보겠다.
우선 그를 모르는 분들을 위해 작품부터 소개하겠다.
변기현작가의 작품 중 『수호천사』는 툰 갤러리에 가면 볼 수 있다.

보러가기

방문전에 얘기는 많이 들었지만 변기현작가의 첫 이미지는 소년의 모습이었다.



샤프한 몸매(?)에 하얀얼굴, 적은 말수, 만화가라고 하기엔 믿기지 않을 정도로 평범하고 수더분한 친구였다.

현재 변기현 작가는 석정현, 최규석작가와 함께 삼단변신 멤버로 활동중이며,
서울애니메이션 센타 창작지원실에 그 근거지를 두고 있다.



“사실상 모과(최규석)형이 떠나면서 저혼자 사무실을 지키고 있었어요. 지금은 멤버는 아니지만 모과형의 친구인 무불형과 함께 있죠.”

마침 필자가 기습했을 당시 정현욱(무불)작가는 없었다.
남산기슭에 위치한 애니메이션센타 4층 창작지원실에 10평 남짓한 공간이 삼단변신의 작업실이다.
물론 애니메이션센타의 지원으로 한시적이긴 하지만 서울에 머무를 수 있게 되었다.

문을 열면 맨처음 보이는 작업실의 모습이다.
전투복이 눈에 띈다. 자랑스런(?) 예비역임을 알 수 있다.
코너를 돌면 변기현작가의 작업공간이 보인다.

“집이 지방(청주)인지라 서울에 작업실을 차려야 했는데 엄두가 안 나더군요.
그래서 지원을 받기위해 신청을 했고 이렇게 공간을 배정받아 지내게 되었습니다.”

2년동안의 지원인지라 2005년 2월에는 이 곳을 비워줘야 한다고 한다.
그의 말대로 집이 지방인 여건 때문에, 이곳의 그의 작업실이자 집인 셈이다.
사실 그가 기거(자취)한다는 느낌은 작업실 구석구석에서 느껴진다.
침대와 옷가지들, 식기류....
하지만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남자 두명의 자취방과는 차원이 다르다.
정리해 놓지 않았다고는 하지만 상당히 깔끔한 분위기에 아기자기한 소품들과 참고서적들...한마디로 아티스트의 냄새(?)가 뭍어 난다고나 할까?


다양한 참고서적과 만화책들


클래시컬한 선풍기...무불작가가 구해온 것이라고 한다.


좁은 공간을 활용하여 만든 간이 부엌



무불작가의 작업공간. 상당히 깔끔하다.


아기자기한 소품들이 곳곳에 자리잡고 있다.

“무불형이 꾸미는 걸 좋아해요. 어디서 이상하고 재미난 걸 구해오죠. 게다가 오디오 광이에요.“

사실 그의 작업환경은 미리 상상한 그것과 차이가 있었다.
압력감지가 약한 4X5사이즈 저가형 타블렛과 오래된 스캐너와 컴퓨터가 고작이었다.



변기현작가의 디지털 장비들

“수작업을 선호하지만 디지털작업도 이 정도 장비면 무리는 없어요.”

사실 그의 수작업으로 제작된 초기 작품을 보면 따뜻함이 뭍어난다.
이번 서울애니센터 창작공모전에도 콘테로 작업한 만화작품을 출품해 놓은 상태였다.

“학교(상명대 만화학과)다닐 때부터 수작업에 익숙해서인지 그게 빠르고 편해요.
물론 요즘엔 페인터와 포토샵으로 작업하지만 아직도 미숙하죠.“



툴을 통달하고 있어도 좋은 작품을 만들어 내는 것이 쉬운일은 아니다.
그것을 활용하는 것은 아티스트의 몫이기 때문이다.
그런 관점에서 그는 자기의 작품을 표현하는 최선을 방법을 알고 있었다.


그의 디지털 작업공간...비좁아 보인다.


수작업 공간
백그라운드

만화가의 어린시절하면 짐작이 가겠지만 그 역시도 학창시절 낙서를 좋아하고,
그림을 곧잘 그리는 소년이었다.
그렇다고 만화를 그린다거나 미대에 진학하겠다는 생각은 없었다고 한다.

“이공계를 선택한 고등학생이었죠. 그러다가 고3 5월달부터 화실에 다녔어요.
결국 대학을 그 당시 생소한 만화학과에 지원하게 되었고, 지금처럼 만화를 그리게 되었습니다.“

사실 학창시절 만화에 큰 꿈을 품은적은 없었지만, 만화와 애니메이션은 즐겨보았다고 한다.







“대학 3학년때 애니메이션을 만들어 보고 싶었지만 결국 포기했어요. ^^
컴퓨터를 잘 몰랐거든요. 힘들다고 느꼈죠.”

사실 스토리를 이어가고 작가(감독)의 사상과 생각을 전달하는 것은 만화와 애니메이션이 같다고 볼 수 있다.
그런 점에서 어쩌면 그는 절반의 꿈을 이룬 셈이다.
그에게 좋아하거나 존경하는 작가가 있냐고 물어보았다.

“『삼국지』의 고우영선생님, 『오 한강』의 허영만선생님, 『해와달』의 권가야선배님 등이 있구요...
오토모가츠히로(아키라),후루야마미노루(두더지, 이나중탁구부),미야자키하야오 등 많은 분들을 좋아합니다. 참, 규석이형도......^^“


작업실 구석에서 발견된 씨지랜드 박스들...석정현 작가가 작품전시회를 위해 얻어갔던 박스들이다.
우측 박스안의 작품은 석정현작가이 중3때 작품이다.


무불작가 자리에 걸린 움직이는 해골...필자카메라의 연사성능을 뽐내기 위함이 결코아니다....흐흐


무불작가가 손수 그려 만든 유니크한 티셔츠



만화이야기

그는 2004동아.LG 국제만화공모전에서 『요구르트도시의 사랑』으로 특별상을 거머쥐었다.
『요구르트도시의 사랑』은 많은 부분이 다르지만 영화 이퀄리브리엄을 떠올리게 한다.
감정을 통제당하는 가상도시에서 요구르트는 건강을 빌미로 시민을 통제하는 수단이 되고, 이미 세뇌되어버린 사람들로 인해 희생당하는 소수를 그리고 있다.

2004동아.LG 국제만화공모전에서 특별상을 수상한『요구르트도시의 사랑』

사실 그의 만화에는 슈퍼맨이 등장하지 않는다. 영웅은 없다는 이야기이다.
현대인의 나약한 모습을 적나라하게 파헤치면서 자아를 의식하게 한다.
그래서 어둡지만 희망은 버릴 수 없는 묘하고도 진한 여운을 남기고 간다.

“제 작품들요? 인디성향은 결코 아니에요. 물론 어느 정도 인디적인 성향은 차용하고 있지만, 상업성에 얽메이지는 않습니다.”

변기현작가의 그림체는 개인적으로 필자가 좋아하는 작화스타일이다. 회화적이면서도 선의 묘사가 독특하다.
또한 캐릭터는 리얼하면서도 만화의 그것에 충실하다.

“선의 묘사요? 유럽풍이죠...이것 때문에 많이 지적을 받았어요. 지금은 예전과 스타일이 다릅니다.”



이 쯤에서 그의 작품과 제작방식을 살펴보도록 하자.

FOOD : 식용인간을 소재로 한 보기 드문 수작이며, 상명대 졸업작품이다.
루돌프 : 루돌프노래를 패러디한 만화이다.
정전기 : 영점프에 단편으로 실렸던 작품
요구르트도시의 사랑 : 2004동아.LG 국제만화공모전 수상작
레이디앤 젠틀맨 : 계간만화에 실렸던 작품. 살찐 여자친구를 설득하려는
남자의 이야기를 그리고 있다.
살인계획 : 가장 최근 작품. 애니센터 단편공모 출품작. 엄마를 죽이려는 소녀의 이야기

“제작방식은 특별한 게 없습니다. 우선 머릿속에 아이디어가 떠오르면 구조를 짜 맞추고,
스토리가 완성되면 콘티작업을 합니다.
콘티는 꼼꼼히 그리는 편이 아니라 대략적으로 그리고 많이 수정을 하면서 원고를 완성해 나갑니다.
원고가 완성되면 스캔후 페인터에서 채색작업을 하구요.
포토샵에서 자르기 붙이기 등의 마무리 작업과 타이핑 작업을 합니다.“


상당히 러프하게 스케치작업을 하는 편이다.

그의 작업시간은 새벽시간이 주를 이룬다.
그렇다고 오전시간을 잠으로 허비하지는 않는다고 한다.

“무엇을 표현하느냐는 문제도 중요하지만 재미를 위해서는 어떻게 표현할 것인가가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주제가 무겁다 하더라도 최대한 가볍게 풀어나가려고 노력하는데, 아직 잘 안되는 것 같습니다.
아이디어는 책을 읽다가도 얻고, 영화를 보다가도 얻고, 인터넷을 하다가도 얻고,
친구랑 대화하다가도 얻고....예전엔 괴롭게 생각을 해서 얻어 냈었는데,
최근에는 소재는 주위에 널려있다는 생각이 듭니다.
흔히 널려있는 생각이나 사물들을 약간 낯설게 보여주는 것 정도...
이후 이야기를 구성하고 연출을 하는데 아직도 어려움을 많이 느낍니다.“

창작이란 것이 가장 큰 고뇌임을 그는 알고 있다.
인간이 살아가는 세상에서 보고 듣고 느끼는 것, 그것이 중심을 이루고
가지를 뻗어가게 되면 SF판타지나 그 이상의 스토리, 오브제가 탄생되어 진다.
그의 작품이 피부로 스며드는 건 아마도 우리가 살아가면서 인식하지 못하는
정신적인 갈등과 상처를 특유의 그림체로 풀어내기 때문일 것이다.

냉소적인 시선으로 세상 가장 어두운 폐부를 행복으로 전이시키는 힘- 이것이 그가 가진 매력이다.



얘기를 마치고 나니 저녁이 깊어가고 있었다. 창작지원실 1층에서 4층을 바라보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