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애니메이션을 이루는 중추신경은 바로 상상력이다"
정도환 기자
얼마 전 영화 시나리오 작가를 만났다. 늘 그렇듯 이야기의 중심은 영화였고, 소설과 연극 애니메이션에 대한 이야기가 오고 갔다. 시나리오을 쓰면서 가장 어려운 점을 물어보았을 때, 그는 '촬영의 현실 가능성'과 '경제적인 측면'을 고려해야 한다고 대답했다.
“작가적 상상력이나 드라마틱한 구성, 상황 전개나 감정의 폭발 등을 시나리오에 담기기가 가장 어렵다” 라는 답을 기대했던 나는 그의 대답에 할 말을 잃었다.
시나리오의 현실성과 경제성, 그리고 우리 영화제작의 실상을 한참동안 이야기 하다가 “소설이나 애니메이션은 참 좋겠다”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블레이드 러너, 1982 – 그 당시 미래사회를 예견한 컬트 영화로 개봉당시 큰 화제가 되었다. 영화에서 보여주는 배경이 현실이 되기 전까지는 블레이드 러너가 담고있는 미래사회의 모습은 유효할 것이다.>
<스페이스 오디세이, 1968 – 우주여행을 하는 미래상을 주제로 한 영화이다. 영화가 개봉된 후에 달 착륙에 성공한 우주인이 이 영화를 보고, 정말 우주에서 본 것과 똑같다고 극찬했다는 후문이 있을 정도로 우주의 모습이 잘 표현된 영화다. 실제로 이 영화는 미국 나사(NASA)의 아폴로 계획에도 반영되었다고 한다.>
보는 사람들에게 상상력을 자극하는 역할을 맡고 있는 애니메이션의 요소를 살펴보자.
첫번째는 ‘스토리’다.
디지털화 된 애니메이션이 가질 수 있는 장점가운데 하나는 이야기의 구조이다. 흥행할 수 있는 구조는 따로 있다는 것이다. 캐릭터에게 어떤 이유로 사건이 생기고 이를 해결하기 위해서 어떤 모험을 하는지에 대한 줄거리를 만들고 액션인지 로봇물인지 판타지인지, 장르를 규정해야 한다. 그리고 누가 볼 것인가에 따라서 액션의 종류나 드라마틱한 요소의 구성을 관객의 눈높이에 맞춰야 한다.
두번째는 ‘캐릭터’다.
애니메이션은 소설이나 영화 보다 훨신 캐릭터의 비중이 크다. 이런 이유 떄문에 캐릭터가 애니메이션의 제목이 되는 경우가 많다. 캐릭터를 산업과 연관시킬 수 있는지 여부에 따라 애니메이션이 성공할 수도 실패할 수도 있다. 순수 예술이 아닌 이상, 캐릭터를 만드는 과정에서부터 매체 특성을 고려해야 한다. 극장용 애니메이션이라면 개성있는 모습에 복잡한 성격을 수용할 수 있는 캐릭터가 좋을 것이다. TV로 방송될 애니메이션이라면 수십~수백회분의 극을 이끌어가야 하기 때문에 성격이 단순하고, 많은 사건을 접하는 직업으로 설정하는 것이 좋다. 인터넷으로 보여지는 애니메이션이나 플래시에 등장하는 캐릭터라면 용량문제를 감안하여 단순한 모습과 서너개의 동작으로 감정을 표현할 수 있도록 구성해야 할 것이다.
세번째는 ‘이야기의 원형’이다.
1~2개의 주요 캐릭터와 부수적인 요소나 상황만으로는 짧은 시간에 시청자를 납득시킬 수 없다. 애니메이션의 캐릭터들은 인간이 가지고 있는 배경지식 안에서 이야기를 전개한다. 캐릭터는 인간의 환경과 비슷한 시공간에서 역경을 딛고 악당을 물리치고 성공하는 이야기를 보여주거나 우정과 사랑, 갈등을 연출한다.
스토리를 이끌어가는 갈등은 ‘뮬란’이나 ‘니모를 찾아서’, ‘라이온 킹’ 등의 가족간에 갈등을 소재로 한 애니메이션과 캐릭터를 지배하는 인물과의 갈등을 그리는 ‘토이스토리’나 ‘알라딘’ 등의 애니메이션이 있다.
세계적으로 극장용 애니메이션을 이끄는 회사는 디즈니와, 픽사, 드림웍스 그리고 지브리 스튜디오가 있다. 동물의 세계를 인간의 모습에 투영시켜 권선징악의 뻔한 이야기를 원형으로 하는 디즈니, 이와 반대로 픽사는 말썽부리고 사고뭉치를 주인공으로 등장시켜 이른바 ‘민중’의 서사를 이야기의 원형으로 삼는다. 드림웍스는 이야기의 기본틀이 정형화되었다기 보다는 디즈니의 전략을 비판하는 스토리를 전개하며 '엘도라도', '개미'를 제작했고 그 바통을 슈렉이 이어받아 2편까지 제작되었다.
그러면 일본을 대표하는 지브리가 가진 이야기의 원형은 미국의 그것과 상당한 차이가 있다. 미국이 동물이나, 역사적인 사실, 신화에서 모티브를 가져왔다면 지브리는 순정만화와 스포츠, 학원물, 로봇을 등장시켜 애니메이션을 만들었고 현실을 환상의 세계에 투영시켜 이야기를 전개했다는 점이 독특하다.
우리나라에는 아직 미국이나 일본처럼 애니메이션만 전문으로 창작하는 스튜디오가 활성화되지 않아서 구성이나 이야기의 흐름을 계보식으로 정리할 수는 없다. 하지만, 우리는 설화나 민화, 어린시절 할머니가 들려주던, 작자미상의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이야기들을 듣고 자랐다. 구전되는 이야기에서 새로운 모티브를 발견할 수 있다면, 아무도 모방할 수 없는, 우리만이 상상할 수 있는 애니메이션을 만들 수 있을 것이다.
요즘 화두가 되고 있는 온라인 게임이 성공하고 있는 비결은 소설과 같은 줄거리에 현란한 이미지와 영상미를 고루 갖추고, 인터넷 기술을 바탕으로 ‘인터랙티브’라는 무기를 가지고 있다. 인터렉티브로 무장한 게임 네트워크 안에서 사람들은 교감을 하며 게임을 즐긴다.
온라인 게임의 장점이 인터랙티브라면 애니메이션에서 필요한 것은 바로 '상상력'이다. 사람들의 상상력을 자극할 수 있는 촉매의 역할을 애니메이션이 해야 한다.
<게임속에서 이루어지는 상호작용 – 게임속에서는 플레이어들이 서로 상호작용을 하며 게임을 이끌어간다. 보여주는 주체와 즐기는 주체가 각각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게임이라는 공간만 제공하고 상황은 모두 플레이어들이 주체가 되어 게임을 이끌어간다.>
화자와 청자가 엄격히 구분된 소설이나 영화, 애니메이션은 아직까지 기술적으로 ‘인터랙티브’를 가질 수 없다. 영화 ‘28일 후’에서 처럼 두개의 결말을 보여주는 것이 ‘인터랙티브’를 대신하기 위한 영화속의 선택적 결말구조인 것이다. 관객은 두가지 결말을 보면서 서로 다른 결론을 내릴 수 있을 것이다. 미약하긴 하지만 이것이 상상력을 자극하는 시발점이 되는 것이다. 애니메이션을 만들고 제작하는 입장에서는 보는 사람의 상상력을 극대화하기 위한 또 다른 수단을 첨가하려는 노력이 필요하다.
<영화 ‘28일 후’에서는 해피엔딩과 비극적 결말을 이어서 보여준다>
3D 애니메이션을 범국가적으로 육성하던 시절, 너나 할 것 없이 실사처럼 렌더링된 3D 이미지를 보고 감탄했고, 이소룡의 근육과 발차기를 제대로 묘사한 애니메이션을 보고 꿈을 키웠을 것이다. 기술적인 면으로 보자면 실사처럼 만드는 기술은 굉장히 중요하다. 하지만 다양한 애니메이션을 접하다보면, 애니메이션은 ‘애니메이션’ 다워야 한다는 결론에 이른다.
<브루스 리, 슈렉 – 굉장히 사실적으로 묘사된 이소룡의 모습과 전혀 현실성 없어보이는 슈렉의 모습이 대조를 이룬다.>
소설이 영화화되고, 만화가 애니메이션으로 만들어지고, 환타지 성격의 줄거리와 상업성이 결합되면서 게임으로 창작되고 있다. 소설과 만화, 영화나 애니메이션은 모두 인간의 오감을 자극하는 문화예술이다. 소설이 작가의 문체로 줄거리를 이끌어나가는 내러티브를 중심으로 만들어졌다면, 만화는 소설이 가진 내러티브에 이미지가 첨가된 장작물이다. 영화는 소설의 내러티브와 상황을 설명하는 만화적인 스토리보드를 통해서 이미지로 연출되고, 그 이미지는 관객에게 배우의 동작으로 보여진다. 그러면 애니메이션이 영화를 뛰어넘으려면 무엇이 필요할까.
소설에서는 독자들이 상상할 수 있도록 글로 풀어 쓰면 되고, 애니메이션은 상상한 것을 그대로 보여줄 수 있다는 것이 작가와의 대화에서 얻은 결론이었다. 물론 직접 소설을 서보고 애니메이션을 만들면 그 분야에도 어려운 점이 있기 마련이지만, 그 상황에서 시나리오 작가는 분명히 애니메이션을 부러워하고 있었다.
<공각기동대, 1995 – 두 권짜리 만화를 오이시 마모루 감독이 애니메이션으로 만들었다. 원작 가운데 인형사와 사이보그 쿠사나기, 인간의 기억과 네트워크, 정보의 바다에서 발생한 생명이라는 세가지 주제만 골라서 애니메이션을 만들어졌다. 99년 영화 ‘매트릭스’에도 영향을 주었다.>
애니메이션의 강점은 무엇인가를 다시 생각해 본다면, 그 해답은 '상상력'이다. 현실에서는 일어날 수 없는 현상을 상상해내는 것이 애니메이션이 가진 힘이다. 극장 애니메이션 가운데 최고의 흥행 성적을 보인 슈렉의 성공비결은 “어린이, 청소년뿐 아니라 어른들까지도 관심을 가질만한 주제를 탁월한 애니메이션 기술을 바탕으로 재치있게 펼쳐냈기 때문”이라고 감히 말할 수 있다. 슈렉에는 모험, 사랑, 패러디 등의 흥행요소가 애니메이션에서만 보여줄 수 있는 상상력과 잘 어우러져 있다.
흥행에 성공한 극장용 애니메이션을 몇 가지 더 생각해보면,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 ‘니모를 찾아서’가 떠오른다. 이 애니메이션의 공통점은 화려한 영상과 함께 줄거리를 이끌어가는 상상력이 기발하다는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