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 여름 블록버스터 대전을 치른 할리우드에 자욱했던 먼지가 가라앉으면서 승자와 패자의 명암이 엇갈리고 있다.
실사를 뛰어넘는 CG 영화를 표방하며 게임팬들을 들뜨게 했던 일본의 야심작 <파이널 판타지>는, 비슷한 때 개봉한 같은 CG 영화 <슈렉>은 물론 <토이스토리>에도 미치지 못하는 저조한 흥행성적으로 제작사인 컬럼비아를 실망하게 했다.
1억4천만불을 투입해 실리콘그래픽스의 최신형 워크스테이션 267대와 오리진의 서버 수십대를 동원, 4년만에 만들어낸 50 테라바이트 용량의 CG 영화가 빛을 보지 못하고 막을 내리고 만 것이다.
더구나 전 세계 게임 매니어에게 3300만개가 넘게 팔리며 구축된 <파이널 판타지>의 탄탄한 지지세력을 감안한다면 참패라 해도 과언이 아닐 듯하다. 기술적으로는 입신의 경지에 이른 것으로 평가를 받은 이 영화가 왜 흥행에선 성공을 거두지 못한 것일까?
우선 제작진이 설정한 목표 자체가 잘못됐다는 것을 들 수 있다. 관객이 극장에서 기대하는 것은 실사 영화 아니면 애니메이션이다. <파이널 판타지>는 본질적으로는 애니메이션이면서 당돌하게도 극장의 스크린에서 실사를 구현하겠다는 목표를 내거는 순간 영화로서 실패가 예정되어 있었던 셈이다.
아무리 정교한 기술로 99.99%에 가까운 인간의 실물을 구현해도 단 0.01%의 오차를 용서하지 않는 것이 인간의 눈이다. 수천만개의 필름입자가 구현해내는 오묘한 빛의 변화는 제 아무리 강력한 컴퓨터와 최첨단 기술을 이용해도 완벽하게 재현해 낼 수는 없는 것이다.
<파이널 판타지>는 이러한 한계를 극복해 실사와 똑같은 실물을 재현해 내겠다고 나섬으로써 실패를 자초한 셈인데 만약 실사가 목표였다면 차라리 배우를 기용해 게임과는 다른 실사만의 세계를 창조해내는 것이 올바른 선택이었을 것이다. 안젤리나 졸리를 기용한 게임영화 <툼 레이더>가 비교적 흥행 호조를 보인 것은 이를 증명하고 있다.
스퀘어사의 이런 패착은 실사같은 컴퓨터 게임 <파이널 판타지>의 성공에 도취됐던 탓이 큰 것으로 보인다. 애초 조악한 그래픽에 길들여졌던 게임매니어들은 실사와 흡사한 그래픽을 구현하는 <파이널 판타지>가 등장하자 열광적인 반응을 보였다.
하지만 이 열광은 어디까지나 '게임'의 영역에서만 의미가 있었을 뿐이다. 똑 같은 게임매니어가 컴퓨터 모니터 앞에서 기대하는 그래픽과 극장 스크린에서 기대하는 그래픽의 내용은 전혀 달랐던 것이다.
이런 면에서 <토이 스토리>나 <슈렉>이 굳이 실물과 똑같은 화면을 구사하기 위해 공을 들이기보다는 오히려 만화적 접근으로 창조된 과장된 캐릭터와 설득력 있는 스토리로 관객을 사로잡았던 것은 매우 똑똑한 전략이었던 셈이다.
영화의 실패에도 불구하고 제작사인 스퀘어가 영화제작 과정에서 축적한 최첨단 신기술은 <파이널 판타지>의 후속 게임을 만드는 데 적절하게 활용될 것으로 보인다.
특히 아키를 비롯한 주요 등장인물의 얼굴에 흐르던 미묘한 감정의 묘사력은 이들이 향후 출시할 예정인 후속판에 그대로 반영돼 게임의 리얼리티를 극대화 하는 데 크게 기여할 예정이다.
월스트릿의 애널리스트들은 <파이널 판타지>의 이번 실패는 제작사인 스퀘어사가 <토이스토리>로 대박을 터뜨린 픽사의 기술력에만 주목하고 독창적 스토리를 창조해내는 이들의 감수성에는 무심했던 탓이 아니냐는 분석을 내놓고 있다.
지금 CG 영화 제작에 몰두하고 있는 한국의 영화 제작자들이 새겨들어야 할 조언이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