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랑스 만화 시나리오의 아버지’가 한국의 만화독자들을 ‘유혹’하고 있다. SF판타지의 걸작 ‘잉칼’ 등 철학ㆍ신비주의 사상을 배면에 깔고 있으면서도 흥미로운 스토리 전개로 유럽과 미국 만화독자들의 마음을 빼앗은 알렉산드로 조도로프스키(72)의 작품이 국내에서 잇따라 선보이고 있는 것이다. 지난해 하반기 교보문고에서 나온 ‘잉칼’(뫼비우스 그림ㆍ이세욱 옮김)을 필두로 이번에는 출판사 북하우스에서 ‘디오자망트의 열정’(장 클로드 갈 그림ㆍ최정수 옮김), ‘라마 블랑’(전2권ㆍ조르주 베스 그림ㆍ홍은주 옮김) 등 두 작품이 번역 출간됐고, 비앤비 출판사에서는 ‘테크노사제’(조랑 장제토브 그림ㆍ이재형 옮김)를 내놓았다.

1929년 칠레에서 태어난 조도로프스키는 복잡한 혈통 만큼이나 다채로운 인생을 살았다. 러시아계 유태인의 아들이었던 그는 처음에는 마임(mime)에 매료되었지만 곧 극단을 버리고 페인트공이 되었다가 광대, 배우, 점술사, 소설가, 연극연출가, 영화감독 등을 전전했다. 특히 국내에도 개봉됐던 실사영화 ‘성스러운 피’에서는 감독, 컬트영화의 고전이 된 ‘엘 토포’에서는 주연, 감독, 각색까지 맡아 예술적 상상력을 유감없이 보여줬다. 데이비드 린치 감독의 ‘사구’와 뤽 베송 감독의 ‘제 5원소’ 각본 작업에도 참가했으며, 일본 애니메이션 ‘아키라’의 감독 오토모 가츠히로에게 ‘메가맥스’의 시나리오를 써주기도 했다.

이번에 출간된 작품들은 ‘그래픽 아트’, 또는 ‘제 9의 예술’로 불리우는 유럽 만화의 개성이 유감없이 드러난다. 특히 스토리를 쓴 작가는 한 명이지만 그림작가들은 모두 다른 만큼 각각의 독특하고 화려한 색채감각을 비교해가며 감상하는 것도 한 방법이다. 50여쪽 분량에 10년 세월을 바쳤다는 ‘디오자망트의 열정’은 새해 첫날 밤을 자신과 보내기 위해 목숨을 걸고 싸우는 전사들을 내려다보는 왕비를 그리는데, 장 클로드 갈의 암울하면서도 그로테스크한 칼라와 배경들이 돋보인다. 또 ‘라마 블랑’은 세기 초 티벳을 배경으로 신이 될 운명을 타고난 유럽인의 모험을 그리고 있고, 자신의 행성으로 침략해 온 파렴치한 해적두목과 그 일당 60여명에게 겁탈당하는 처녀를 주인공으로 한 ‘테크노 사제’는 장테토브의 컴퓨터그래픽을 활용한 현실감 넘치는 그림이 인상적이다.

현실과 꿈을 왕복하면서 영감이 넘치는 스토리로 자신의 성채를 지어온 이 거장의 ‘프로포즈’가 상대적으로 다른 유머감각과 취향을 보여온 한국의 독자들에게 어떻게 받아들여 질 지 주목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