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은 원화, 동화를 제외한 모든 애니메이션 제작 과정에 컴퓨터가 쓰이는것이 당연하게 여겨질 정도로 디지털 애니메이션이 거의 정착되어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렌즈맨, 고르고13등에 시험적으로 적용되던 초창기의 애니메이션계에서 CG의 도입은 디지털 애니메이션의 가능성을 증명하기에는 아직 시기상조였다.

이유는 당시 하드웨어가 뒷받침 되지 못했고 디지털 애니메이션=3D라는 고정관념등 여러가지 이유를 들수 있겠지만, 디지털이란 마법을 제대로 소화해 내는 크리에이터가 없었다는 것이 문제였다. 하지만 그런 와중에서도 단편을 중심으로 디지털 애니메이션의 가능성을 보여준 크리에이터 집단이 바로 애니메이션 "아키라" 제작의 중심 인물 중 하나인 모리모토 코지가 이끄는 스튜디오 4도이다.

당시 스튜디오 4도가 ‘엑스트라’, ‘노이즈맨’, ‘서바이벌’ 등에서 보여준 가능성들 – 가령 일반 투과광 기법으로 구현하기 힘든 빛의 표현이나 3D적 공간으로 인한 다양한 카메라 워크 등은 많은 애니메이션 크리에이터들에게 커다란 자극이 되었다. 또한 지금은 지브리의 작품에서도 심심치 않게 볼 수 있을 정도로 일반화 되었다.

스튜디오 4도가 다른 애니메이션 제작집단과 차별되는 점이 또 하나 있다. 바로 상업적인 다작을 거부하며 작가주의를 중심으로 하는 개성적인 단편작품을 고집하고 있다는 점이다. 스튜디오 4도는 일반인들에게 거의 알려져 있지 않으며, 몇몇 마니아들 사이에서만 큰 관심을 끌게 되었는데 정작 작품을 접할 방법이 거의 없어 단편집의 DVD 화에 대한 요청의 목소리가 높았다. 그 요청에 부응하여 ‘스튜디오4도 DVD 컬렉션No.1-디지털 쥬스’이다.

크리에이터들의 재능이 농축된 ‘디지털 쥬스’

수록된 작품들의 크리에이터들을 잘 살펴보면 현재 일본 게임, 광고, 애니메이션계에서 그 실력과 독특한 세계관을 인정 받고 있는 배태랑 작가들임을 알 수 있다.

공중선술집(사진1) by 모리모토 코지

공중에 떠있는 선술집에 모여 취해서 각자 의미없이 주고받는 커뮤니케이션. 그중 한명인 와인양은 3개월동안 생리가 오지 않아 고민하는데… 지금의 스튜디오 4도를 있게 한 모리모토 코지의 첫3D 애니메이션. 풀3D에 실사의 얼굴을 결합한 그로테스크하면서도 유머러스한 분위기의 이 작품에서 모리모토 코지가 발견한 궁극의 사이버 펑크-그것은 머나먼 미래의 고철더미가 아닌 조금만 걸어들어가면 발견되는 뒷골목의 인간 군상들과 의미없는 행위였다.

치킨보험에 가입하세요(사진2) by 안도 히로아키

아무런 간섭없이 자유롭게 살아가는 두마리의 병아리에 수상한 치킨 한마리가 다가와 치킨보험에 가입할것을 끈질기게 설득한다. 그는 노아의 방주에서 살아남은 치킨의 역사까지 거슬러 올라가며 보험의 중요성을 역설하지만… 오토모 카츠히로의 ‘메모리즈’에서 CG감독을 맡아 아날로그적인 느낌의 디지털 애니메이션에 대한 가능성을 확인시켜준 장본인. 그 역량이 이 작품에서도 십분 발휘되는데, 특히 주목할만한 것은 2D처럼 보이는 캐릭터가 모두 3D이며 붓터치 느낌의 표면처리는 독자적으로 구상한 렌더링 기법에 의한 것이다.

규각(圭角) (사진3) by 오하라 히데카즈

가부키의 양식화와 일본의 시대극 분위기를 하드보일드와 결합, 락의 리듬과 조화시킨 뮤직클립에 가까운 작품. ‘씨씨레몬’, ‘쿠’등의 광고 애니메이션을 제작한 오하라 히데카즈의 절묘한 연출 타이밍과 적은 애니메이션으로 최대의 효과를 발휘하는 감각적인 연출이 돋보인다.

Table&Fishman(사진4) by 코바야시 오사무

생선의 머리를 한 남자 피쉬맨과 연인인 테이블이 이야기하는 자신들의 과거. 그들은 원래 서로 우연히 눈이 맞은 갱과 창녀인데 강력한 운을 가진 남자는 모든 도박에서 승승장구하며 결국 세상의 끝에서 최후의 도박을 벌이게 된다. 그 결과…‘그란디아’와 ‘청의6호’등 게임, 애니메이션의 캐릭터 디자인등 독특한 화풍을 자랑하는 코바야시 오사무가 내추럴 본 킬러에 자신의 취향을 결합해서 그려낸 하드보일드 코메디.

월야의 한밤중에(사진5) by 야기누마 카즈요시

홀로 열심히 살아가는 소녀 카린, 영원히 살아가는 남자 갈레리오, 그리고 자신에게는 없는것에 무작정 동경을 품는 소년 켄타의 만남을 그린 맑고 투명한 작품. 왕립 우주군과 아키라 등에서 원화로 활약한 야기누마 카즈히코가 자신의 원작만화를 기반으로 투명하게 그려낸 동화같은 세계. 이 작품집중에서 유일하게 셀 애니메이션에 가깝고 가장 섬세한 움직임을 보여준 작품이다.

도인(陶人) 키트(사진6) by 타나카 타츠유키

아키라를 비롯, 린다 큐브라는 게임으로 독특한 사이버 펑크의 세계를 보여준 타나카 타츠유키가 첫 감독을 맡은 작품의 예고편. 치밀한 배경설정과 독특한 캐릭터, 단조롭지만 차분하면서도 무게있는 색상등이 매우 돋보이며, 가장 시선을 끈다

아마츄어로 회귀한 프로들

디지털 애니메이션의 선구자들이 상품으로 내놓은 이 작품집은 놀라움이 아닌 일종의 서글픔 이다. 작품 표현의 시도와 완성도는 주목할 만하며 그만한 가치도 인정된다. 하지만 문제는 전체적으로 보았을 때 프로의 작품이라고 보기 힘든 상업적 가치를 지니지 못했다는 점이다. 전 작품이 각각 3분이라는 시간 내에서 이야기들을 제대로 소화시켜내지 못하고 표현기법만이 허공을 맴돌다 허무하게 끝나버린다. 가장 디지털 애니메이션의 첨단을 걸으며 실험적인 작품을 추구하는 스튜디오 4도의 특성이 이제는 여타 애니메이션 회사들도 쉽게 구현하고 있거나 또는 더 앞서나가는 지금의 상황에서 그다지 시선을 끌지 못한다는 점이다.

이 작품집이 가지는 의미는 놀라운 첨단 디지털 애니메이션을 경험하는데 있는 것이 아닌, 작가가 애니메이션계에 얽매여 있는 모든 제약에서 벗어나 마음껏 자신이 만들고 싶은 작품을 만든다는데 있다. 그로 인해 이 작품집은 스튜디오 4도라는 이제까지의 모리모토 코지 색깔이 아닌 각 크리에이터의 개성들이 수줍게 빛난다. 아마츄어로 회귀한 프로들의 작품은 그래서 흥미롭다.

다음의 DVD 컬렉션은 모리모토 코지의 단편집이 될 것이라고 한다.